[매일성경]10분 묵상

교리파괴(유연성) / 욥기 9:1-35

스윙핸즈 2023. 11. 13.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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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파괴(유연성)

2023.11.13.

욥기 9:1-35 // 22. 일이 다 같은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23.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지라도 무죄한 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시리라....

 

오늘 함께 생각할 주제는 교리파괴(유연성)”입니다.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욥기서는 한 부분만 보아서는 그 내용의 맥락을 이어갈 수가 없는데요, 4,5장의 엘리바스의 충고, 그리고 욥기8장의 수아사람 빌닷의 충고가 이어지고 있다고 보셔야 하고, 빌닷의 두 번째 펀치에, 지금 욥이 방어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될 듯 합니다. 왜 펀치라고 표현을 했냐면, 친구로서 그를 위로하기 위해 3명의 친구가 왔지만, 욥의 한탄과 괴로움을 일주일이나 옆에서 들으며~ 하고 싶은 말이 생긴거겠죠. 훈수입니다.

4,5장의 엘리바스는 우리가 지난주에 많이 살펴봐서 내용을 잘 아실텐데요, 엘리바스의 논지는 이러했습니다. 첫째, 사람은 뿌린대로 거둔다.. , 네가 잘못한 것이 있으니 지금 고난이 아니겠는가? 둘째,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말고, 어서 돌이키라...

물론, 욥은 이에 억울하고, 엘리바스 니가 지금상황을 잘못 진단했고, 내 아픔과 슬픔에 대한 너의 태도에 나는 마음이 무너진다고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곁에서 듣던 빌닷이 훈수를 시작합니다. 욥기 8장인데요, “, 너 그거 아니다, 엘리바스 말이 맞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의인을 공격하시겠냐? 제발, 옛 믿음의 선조들의 길을 따라,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라...”고 합니다.

 

8:8절입니다.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13-15절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붙잡아 주어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 엘리바스의 충고처럼, 오늘 빌닷의 충고 역시 문장과 단어만 보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잘 각인해야 할 정도로, 소위말하는 [정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정답은 욥에게 오히려 상처와 분노가 되었습니다.

욥은 오늘본문 9장에서 이에 대해 변호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칩니다.

 

1-3.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빌닷 네 말이 맞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인간이 자신의 논리를 자랑하겠는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는 무력한 인간일 뿐이다.

11,12.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

하나님을 누가 막겠는가? 그가 판단하시는데~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15,16절입니다. “15.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 16.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하지만, 만약, 내가 의로운데,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상황에 이른다면, 나는 하나님과 변론하기 보다는, 그에게 소망을 두고, 자비를 청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주권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17절에서는 이상한 말을 합니다.

17,18절입니다. “17.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 18.나를 숨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을 내게 채우시는구나

근데, 하나님께서 까닭없이 나를 치시고, 상처를 내신다는 것을 나는 지금 상황을 통해 배우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건, 난리가 날 엄청난 발언입니다. 보시죠~

당시의 생각은 세상이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은 모두 하나님의 분노표출, 진노하심으로 여겼었는데요, 사실 오늘날의 샤머니즘(미신)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죠. 신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 어찌어찌해야 한다...

엘리바스와 빌닷의 주장은, 네가 고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환난을 주시는 것이고, 너에게 진노하신 것이고, 그 진노와 심판은 네가 무엇인가를 잘못했음에 틀림없다는 결론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이미 답이 정해져있는거죠.) 그런 그들에게, 지금 욥은 나는 잘못이 없다. 하나님이 까닭없이, 이유없이 나를 공격하셨을 수도 있지 않는가? 나는 그걸 지금 배우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욥의 딜레마는, 자신은 죄를 짓지 않았다. 단지,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존재론적으로는 한없이 부족한 인간 맞는데, 정말 부족함이나 허물,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공격하시는 것인지 자신을 모르겠다고 합니다. 오히려 이렇게 생각합니다.

22. “일이 다 같은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온전한 자나, 악한자나 하나님은 똑같이 보시는게 아닐까?? 하는 질문을 합니다.

다시 설명하면 이런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러요. 그래서, 너는 특별하다고 배워왔습니다. 교리로도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고 특별히 여기시는 하나님. 그런데, 오늘 욥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근데, 그게 아닐수도 있지 않나?’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똑같이 대하시는 것 같다.

왜냐면, 악인을 공격하시는 것은 당연한데, 신자를 공격하시는 것이 이해가 안된다.

악인도 공격하고, 신자도 공격하고... 둘다 공격하시는데? 왜?

내가 얼마나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겼는데... ’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하나님은 둘을 차별을 두지 않는거 아닌가??

 

하나님 앞에 모든 인생이 똑같다. 라는 말을 하는데요, 이게 세 친구에게 수용이 되었을까요? , 그래서 욥기가 40장까지 계속 이 논쟁을 벌입니다.

그러면, 오늘 질문. 우리는 이 질문에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신자와 비신자를 똑같이 대우하실수도 있겠다...라고 하면요? 저를 이상하게 보시겠죠?ㅋㅋㅋ

 

우리는 이런 어떤 사안들을 교리라고 해서, 확정해서 배웁니다. 좋은 현상입니다. 좋은 방법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약점이 있습니다. 이 테두리를 벗어나면, 용납을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죠.

 

예전에, 저는 물건을 사면 설명서를 무조건 읽는다고 했습니다. 설명서를 읽고, 그대로 사용하는 거죠. 숨겨진 기능도 배우고, 오래오래 깨끗하게 쓰는 방법이나, 고장났을 때의 대처법까지 미리 익혀둡니다. 근데, 요즘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살림천재들이 있더라구요. 다이소에서 파는 집게인데, 이걸 칫솔걸이로 쓰면 좋다고 합니다. 조리도구 걸이에, 선글라스나 우산을 걸어서 정리하면 깔끔하다고 합니다. , 저는 이런게 신기합니다. , 집게를 왜 칫솔걸이를 써? 집게로 써야지~(조리도구도...) 어떻게 여기다가 이걸 쓸 생각을 했지? 유두리가 한없이 있는 사람들인거죠.

 

성경도 이런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어떤 원칙이, 진리는 아니라는 것. 진리가 원칙은 아니라는 걸 기억하시면 어떨까요? 교리가 원칙이긴하지만, 교리가 예수님 자체는 아니라는 거죠. 예수님보다 교리가 앞설수 없다는 것에 모두들 동의하시죠?(예수님, 교리에 어긋나시면 안돼요~)라고 말할 수 없는거죠. , 그겁니다.

만약, 신자와 비신자를 하나님께서 똑같이 대우하신다면, 신자인 우리는 사실 심정적으로는 마음이 많이 상합니다. ( 아니, 하나님 나랑 특별한 관계가 아니셨나? 어떻게 그러실수가 있어?) 하지만, 반대로도 생각해볼수 있지 않을까요? 내가 비신자라면, 내 남편이, 우리 부모님이, 우리 자녀가 비신자인데, 이제 막 믿음의 세계로 들어오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모두 공평하셔~ 신자뿐 아니라, 미그리스도인이었던 너에게도 은혜와 사랑을 베풀고 계셨어.라고 말한다면요? 그러면, 너무 감사하고 감격스럽지 않을까요? (설마, 이런 분은 없으시겠죠?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면, 너는 사랑을 받지못해, 지금 들어오면 너도 우리처럼 사랑을 받을 수 있어. 지금 빨리 가입해~)

교리와 원칙은 가이드입니다. 혹시, 우리가 너무 자유분방하게 살다가, 엉망진창으로 살까봐 테두리를 쳐주는 것입니다. 신약의 교회들, 고린도, 데살로니가, 에베소 등의 모든 교회들이 이 문제로 싸웠습니다. “에이~ 마음만 믿음이 잇으면 되지, 우상숭배나, 고리대금업이나, 노예를 팔고사고, 문란한 성생활을 이어가도 괜찮아~ 너무 안된다,안된다만 하면 고리타분하지...” 물론, 반대쪽에서는 이걸로 엄청 공격을 했겠죠. , 원칙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원칙을 벗어나는 사안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지요.

 

오늘 우리는 이렇게 정리하면 어떨까요?

오늘 우리가 하고자 하는 말은,

‘교리파괴’가 아니라, 유연한 교리입니다.

원칙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너무 멀리가지는 마시지요. 원칙 안에 잇는 우리 역시, 선을 밟았다고 해서, 혹은 선 밖으로 잠시 나갔다고 해서, 악인이거나 저주받는다라고 과격하게 말하지 않을테니 말입니다.

엘리바스나 빌닷처럼, 답을 정해놓고 살지 않기, 선긋지 않기, 욥이 처한 상황과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며, 그럴수도 있겠다라는 이해의 폭을 넓히기... 우리는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야 할지 고민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파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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