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10분 묵상

이생망 / 마가복음 10:1-12

스윙핸즈 2024. 3. 7.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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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망

2024.03.08.

마가복음 10:1-12 // 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오늘 함께 생각할 주제는 이생망입니다.

예전에 가까이 지내던, 물론 아직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한 후배목사님이 매일 쓰던 말이 있습니다. 이생망. “목사님, 저 이번 생은 망한거 같아요. 이번 사역지도 행복하지 않아요.” “목사님, 이번 생은 망했어요. 절 괴롭히는 사람이, 일이 있네요~” 워낙 유쾌한 친구라 약간 장난스럽게 말하는 것이긴 했지만, 어찌됐든 현재 상황이 불편하다는 속내였습니다.

요즘 시대 우리는, 불편함을 잘 참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그럴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도 마음이 편해야 뭔가를 잘 해 볼 의욕이 생기니까요. 학교도 그렇고, 회사도 그렇고, 가정도~ 긴시간 몸 담고 있는 곳이 마음이 좀 편해야 한다는 건 당연한 거죠. 저는 심지어, 식당에 가서도 뭔가 불편할 것 같다...라고 생각하면, 다음에 온다고 인사하고 나옵니다. 옷을 사러 갔다가도, 어떤 상점에 가격을 물으러 갔다가도, 친절함이 없는게 확연히 보인다면, 우선 목적을 내려놓고 나옵니다. 마음이 상한채로, 서로 무언갈 시작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오늘 본문의 주를 이루는 이혼이라는 주제를 이런 측면에서 보면~ 좀 맞지 않습니다. 우선은, 당시의 이혼제도인데요.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이혼과는 문화와 환경이 매우 다르다는걸 인식하셔야 하는데요. 2000년전 예수님~ 심지어는 4000년전 모세시대, 출애굽, 광야시대, 그러니까 우리가 세계사적으로, 청동기시대 때 말하던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 말하는 것임을 기억하시고 논의하셔야 합니다.

당시~ 그러니까, 2000년전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은 일인지 질문했습니다. 이혼이라고 말하지 않고, 아내를 버린다고 말했는데요~ 이 질문의 전제인 4000년전 광야에서의 율법의 문화는 여자를 물건으로 간주했습니다. 청동기시대에, 여성은 어떤 법률적 권리도 없었고, 가족의 남자가장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이었던 거죠. 종살이 했던 애굽의 영향인지, 원래 유대민족이 그러한지 모르겠지만, 청동기시대라는 것을 감안할 때, 현재의 인권사상에는 한참 못미치는 말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남성은 여성을 어떤 이유로든~버릴 수 있었습니다. 아내가 예쁘지 않다거나, 살림을 못한다거나, 요리를 잘못하거나, 지루해지거나, 말도 안되는 어떤 이유든 붙여서 버릴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모세는, 그러지 못하게 여성을 보호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이혼증서를 써주라. 그리고, 여성이 이혼 후의 삶을 도모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거죠. // 요즘의 이혼도 그렇게 긍정적 보아주지 않는데, 당시의 고아와 과부가 사회적 약자였던 것으로 볼 때, 이혼증서는 최소한이었습니다. 초기 이혼증서에는 뭐라고 쓰여있었냐면, 아주 간단하게 몇문장 쓰여있었는데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 증서는 당신이 원하는 어떤 남자와도 결혼할 수 있도록, 주는 이혼문서이며, 퇴거의 편지며, 해방의 증서다.] 사실, 이혼증서라기 보다는 재혼을 허용해주는 이전남편의 보증서?정도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데, 대단한 것처럼 말합니다.

근데, 문제는, 이 이혼증서에 대해서, 율법주의자들은, 앞뒤 상황 안가리고, 모세이후, 예수님 당시까지 첨예한 논쟁을 했습니다. 한쪽, 보수주의자들은 이혼은 절대 안된다고 고집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다~) // 다른 한쪽은요?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아내가 요리를 잘못하거나, 길가에서 천을 짠다거나, 모르는 사람과 길에서 얘기를 하거나, 남편의 친척을 험담하거나, 목소리를 높여 이웃집에 들리게 하는 경우) 등의 광범위한 이유로 이혼해도 된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학파는 아내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하면 이혼해도 된다고도 해석했습니다. 율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던 거죠.

오늘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질문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좋은 의도는 아니었던 걸로 보입니다.

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시험하여 묻되.... 여기서 예수님이 yes라고 말하면, 보수주의 랍비들에게서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안된다고 했으니까요. 만약, 예수님이, no라고 대답하면요? 진보주의자들과 척을 질 뿐 아니라, 당시 로마에서로 논란이 많았던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도 문제가 생기는 건데요... 세례요한이 누구에게 죽었는지 기억하시나요? , 헤롯과 헤로디아입니다. 잔치석상에서 춤을 춘 딸에게, 네 소원을 들어주마 했더니, 엄마였던 헤로디아는 불법적인 결혼, 동생의 아내와 결혼을 한 것을 질타한 세례요한을 죽여달라 요구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잘만하면 세례요한의 뒤를 이어, 예수도 같은 자리에 세울 기회라고도 보았던 것이죠.

예수님은 그러면 무엇이라고 하셨나요?

3-5절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결혼은 온전하다. 이혼증서는 예수님보다 앞선 2000년 광야시대의 궁여지책이지, 이혼증서를 써서 아내를 버리라고 율법이 허락해 준 것 아니다. 그러면, 모세의 당시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이다. 제도가 먼저가 아니라, 여성을 보호하는 것이 먼저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제도를 손볼 때가 되었고, 이미 한참 지났는데도~ 자의적으로 율법을 해석하고, 이용하는 너희의 의도에 대해서~ 그 완악함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 다시 정리할까요?

1)결혼은 무엇일까요? ,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온전한 가정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율법에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아내를 버릴 수 있는 조건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2)그러면, 이혼은 무엇일까요? 모세의 발언은, 이혼허락이 아니라, 약자에게 증서써주기~입니다. 버려지는 여인과 자녀를 임시로라도 보호하기 위한 증서쓰기였지, 하나님이 만드신 가정제도를 임의로 파괴해도 된다는 허락의 의미는 아니었던 것이죠. 결국 논지는, 율법이 말하는 것은, 도덕법~ 긍휼입니다. 인지상정이라고 이해하셔도 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보통의 정서, 인정, 자연스러운 감정을 말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가정을 보호할까? 어떻게하면, 여성과 어린아이들을 보호할까?를 고민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약자보호, 이게 율법의 정신입니다.

 

그러면, 결국 돌고돌아, 오늘 우리는 이혼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으니 될대로 되라... 혹은, 그냥 대충 살자, 참아라 버텨라, 아니면 마음가는대로 확 해버려도 된다라고 해도 될까요? 

우선은, YES OR NO로 대답하고 싶은 유혹을 피하시고, 생명을 살리는 일과 긍휼이라는 측면으로 접근하시면 어떨까요? 당사자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단정 지어버리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예를들어, 가정폭력과 같은 어떤 범죄나 위험에 가정이 노출된 상황이라면, 단순히 버티거나 한쪽이 희생해야 한다는 말로는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또는, 부부간의 신의를 저버리는 일들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사안입니다. 외도가 될 수도 있고, 도박, 마약, 사채, 투기, 알콜중독부터 시작해 다양한 중독, 등의 부부간의 신의를 저버리고 가정의 위기를 초래하는 극단의 행동들과 같은 그런 종류 들은 청소년복지와 인권과 여성복지, 청소년보호라는 관점으로 가정의 보호라는 측면에서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사안입니다. 물론, 이 부분은, 사람마다의 사연이 있고, 가정마다의 상황이 있는데, 이 판단 역시 주관적으로 흐를 수 밖에 없는 저의 좁은 식견일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이혼은 쉽게 말하며 취급거나, 또는 그래도 된다고 조장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한 사람의 악의적인 결정이나 잘못이라고만 치부해버릴 수 없는 상황도 존재합니다. 그만큼 어렵고 민감한 사안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이혼이든, 결혼이든, 사랑이든, 그 어떤 것이든~ 생명을 살리고, 회복하고, 치유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함을 기억하시지요. 역시나 성경보다 어려운 것은 성경을 살아내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혜가 부족한 우리에겐, 여전히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은혜와 지혜를 항상 사모하는 꿈터 공동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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