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10분 묵상

자기보호 / 사도행전 20:17-38

스윙핸즈 2024. 6. 14.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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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보호

2024. 06.14

사도행전 20:17-38 // 22.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오늘 함께 묵상할 제목은 사명/자기보호입니다.

 

예전에 같이 일하던 동료 중에, 뭘하자고 하면 뭐든지 싫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커피를 마시자, 운동을 하자, 그러면 일을 하자....” / “제가 피곤해서요, 힘들어서요, 저는 그걸 좋아하지 않아요.” 이런 솔직한 이유라면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피곤할까봐요, 체력이 안따를까봐요, 그 이후의 시간이 무리가 될까봐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마치 기정사실화 일어난 것처럼 말하면서, 요청들을 회피했습니다. 나중에는 이사람에게 아주 가벼운 것도 함께 하자는 말을 못하겠더군요~ 제 입장에서는, ‘정말 자신을 그렇게 아끼는 걸까?’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제가 싫어서 그런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사실, 저는 주변에서 자신을 과도하게 보호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힘들까봐, 아플까봐, 창피할까봐, 어려울까봐, 실패할까봐, 무리가 될까봐.... 무엇 할까봐, 결국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사실을 미리 염려하고, 사전에 자신을 보호하는 것을 말하는 건데요, 안전사고와 같은 생명과 건강에 문제가 되는 것들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 그 외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괜찮은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넘어질까봐 자전거를 타지 않는다거나, 넘어질까봐 운동을 안하거나, 실패할까봐 취직하지 않고, 어려울까봐 시험보지 않는게 사실 불가능한데 말입니다.

이런 측면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소명, 신자에게 부여된 사명이라는 측면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유지하는 것에 문제가 없는 것인가? 꼼꼼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본문 사도행전 20장의 사도바울의 고별설교에서는 바울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서 바울은 밀레도라는 지역에서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부릅니다. “장로님들, 동역자들, 만납시다.” 에베소와 밀레도가 48km 떨어진 하루반나절 정도의 꽤 먼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장로들은 한달음에 달려와 그리웠던 바울을 만납니다. 그리고, 바울은 오랜 그의 동역자인 장로들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선포하고, 다시 이별의 인사를 나눕니다.

바울의 메시지는 이러했습니다.

장로들이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선포할 것, 교회를 거짓선생과 거짓 교리로부터 보호할 것을 부탁합니다. 더불어, 부지런하고, 겸손한 섬김의 본을 보일 것을 요청합니다. 본인이 그래왔던 것처럼 본을 따르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자신의 일생을 마무리하는 고별설교를 보며, 우리는 그의 삶의 태도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동역자들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겸손과 성실, 열심히 주의 사명을 감당했다는 것, 사랑과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명자로서 단호하고, 결단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랑 다를 것이 없는 같은 인간이었지만, 사명에 있어서는 정확했던 사람입니다.

24절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요?

사명과 자기보호입니다.

자기보호는 바울의 최우선순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복음전파자인 자신의 책임에 비해 별로 귀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경주에 비유했습니다.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경주를 마치는 일에 초점을 맞춘 운동선수처럼, 또는 군인처럼, 또는 수고하는 농부처럼,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수련과 수고를 기쁨으로 하는 사명자를 자신에 비유했고, 또 디모데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심지어 바울은, 미리 어떤 일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고 잇었습니다.

22,23.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

자신은 사명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23,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는 동료들을 통한 성령하나님의 음성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는 메시지를 수차례 들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의 방향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에게는 자기보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사명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요?

자기를 보호하는데 너무 급급한 것은 아닌지, 염려와 불안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닌지, 목적과 소망, 그러니까, 사명인식이 너무 흐릿한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셔야 합니다.

운동선수와 군인, 농부는 같은 점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훈련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냥 어느날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달려 본 적도 없고, 총도 안 쏴본 자가 갑자기 군인이 될 수 있을까요? 체력을 증진하지 않은 선수가 긴 레이스를 통과할 수 있을까요? 도시에 살던 이가 갑자기 귀농한다고 농사를 떡하니 짓거나, 머릿속에 있는 지식으로, 벼가 왜 안크는지, 바람이 불어 쓰러진 농작물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단번에 해결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하루 아침에 저절로 무언가 되어질 것이란 꿈을 꿔서는 안됩니다. 일상의 훈련, 그리고 실전이 바탕되어져야 함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너지가 없다고 말하거나, 이미 방전된 체력을 주일이라도 채우고 싶다할 때가 있습니다. , 물론 우리는 이미 한주간 일터와 일상에서 많은 감정과 체력을 사용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 삶의 고된 훈련 뒤에 주시는 말씀의 회복을 경험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는, 내 자신의 과도한 자기보호보다 한발짝 먼저, 우리를 회복하고 계심을 기억하시면 어떨까요? “괜찮아, 그정도는 할 수 있어.” “내가 함께 한다면, 지난번보다 이번에는 더 수월하게 하게 될 거야~”라고 주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지 않으실까요?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 훈련과 회복, 사명을 감당함이 가능함을, 자유롭고 기쁘게 이 일들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을 신뢰하며, 인간적 계산이 앞선 자기보호는 내려놓는 신실한 성도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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