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10분 묵상

기독교인은 어떤 대화를 해야 할까요?

스윙핸즈 2024. 6. 6. 22:43
반응형

 

대화주제... (기독교인은 어떤 대화를 해야 할까요?)

2024.06.07.

사도행전 17:16-34 // 16.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17.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오늘 함께 생각할 주제는 대화주제입니다.

지난주 장례식에 갔다가 친구목사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희 세대의 목사들은, 어떤 나쁜 목사가 있다. 양심없는 인간, 부도덕한 인간, 뻔뻔한 인간이 있는데, 어떻게 인간으로서 그럴수가 있는가? 그러면 목회를 하지 말아야지~ 라는 얘기를 합니다.

목소리를 낮춰가며, 한참 얘기를 나누는데, 직장다니는 친구부부가 들어왔습니다. 대화주제는 곧 바뀌었습니다. 요즘 사는 얘기, 캠핑을 다니고, 운동을 하고, 건강관리를 하고, 살면서 겪는 내적인 고민, 해결점, 또 아이들이 얼마나 컸는지, 부모님들은 건강하신지 근황을 나누면서 즐겁게 얘기했습니다.

친구들을 알고 지낸지, 길게는 중학생 때부터, 짧게는 결혼 전부터 만나온 사이라, 서로가 그립고, 궁금하던 사람들이었기에, 대화는 멈출 줄 몰랐습니다. 좋아하는 사람들이었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대화였습니다. 그런 사람들과의 대화는 사실 어떤 주제보다는 함께하는 것이 즐거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 우리는 호감을 가진 사람들 뿐만 아니라,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다른 배경의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도 많습니다. 그런, 피할 수 없는 대화의 자리에서 여러분은 어떤 주제로 대화를 하시나요?

또는, 이런 생각해보셨나요? 내가 기독교인이라면, 어떤 주제로 대화를 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옳을까?

오늘 사도행전 17장에서 등장하는 사도바울은, 아테네를 방문했고 격분했습니다. 우상이 가득한 그 도시를 보며, 마음에 분하고, 화가 났다고 말을 하는데요. 오늘은 바울의 격분의 이유가 아니라, 격분으로 인한 그의 행동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16,17,18절입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 17.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 18.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바울은 적어도 2곳에서 쟁론, 격하게 토론했습니다. 첫 번째는, 회당이었습니다. 회당에서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다투듯이 토론했습니다. 두 번째는, 장터에서 철학자들과 난상토론을 벌였습니다. 오늘 17장 중후반부에서는 철학자들과 논쟁한 바울의 설교를 수록하고 있지만, 둘다 체크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바울은 회당에서 유대인과 경건한 자들과 격하게 토론했습니다. 회당이라면, 오늘말로 교회 같은 모임이었을텐데요, 무엇을 주제로 격하게 토론했을까요? , 유심히 보지 않아도, 압니다. 예수입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주제만을 가지고 계속 토론했을까요? 스데반의 설교를 기억하신다면, 바울의 대화주제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성경역사에 등장하는 예수의 이야기, 다윗과 솔로몬, 족장시대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가, 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어떻게 살아야하고, 실제 오신 예수를 따라, 이제는 우리가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요? , 맞습니다. 예수와 부활을 말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지만, 아직 예수그리스도, 메시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신앙의 진보가 필요한 자들에게 예수와 부활을 가르쳤던 것이죠. , 오늘말로 복음전도와 함께, 양육이라고 보셔도 될 듯 합니다. 토론, 쟁론했다는 말은, 가감없이 묻고, 답하면서, 그들의 생각을 일깨웠다는 의미로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분명히, 예수와 복음에 대해서 설명했을 겁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았을 겁니다. 현실의 주제들, 로마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신자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압제당하는 이스라엘은 어떤 입장인지, 왜 우리는 고통 중에 있는지, 구원의 메시아는 언제오시는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아이, 여성과 노인과 같은 약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신자가 된 자들은 세상에 어떤 자세로 임하고, 사회에 참여해야 하는지, 또 이 복음을 어떤 식으로 전해야 할지, 어떤 반대가 있을지, 핍박과 환난에 대해서는 어떻게 임해야 하는지, 다양한 분야에서, 세세하게 대화를 나눴을 겁니다.

, 그러면, 오늘 우리는 교회 안에서 어떤 대화들을 해야 할까요?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좋은 사람들과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든 좋은 감정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의 공동체는 서로 그리운 사람들이니까요. 하지만, 신앙공동체가 나누어야 할 시급한 주제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개인의 삶에 산재한 어려움, 자녀교육, 회사에서 업무를 대하거나, 상급자와 하급자와의 관계, 이웃주민들과의 우정을 어떻게 쌓아나가야 할 것인지 등에 대해, 개인의 관점이 아닌, 성경적 관점이 무엇인지 여전히 모든 신자에게는 고민입니다.

이런 시급한 사안들을 간과한 채 혹여, 우리는 여전히 교제 운운하며, 세속적인 대화들에 더많은 비중을 두는 것은 아닐까요? 시급한 사안이라 말하는 이유는, 이 주제로 여전히 갈급한 마음, 애타는 마음, 밤잠 설치며 신앙양심에 가책을 받거나, 홀로 기도하며 고군분투하는 신자가 바로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목사로서, 고민하는 주제들이 많습니다. 우리 아파트에 기독교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동탄이라는 지역에 교회에 대한 오해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이기적이고 편협한 곳이 교회가 아니라, 사랑과 배려, 희생이 있는 곳이 교회이고, 정의와 바름을 지키려 노력하는 양심적인 신앙공동체임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입니다.

만약, 제가 이런 신앙적 고민이 가득한 성도님을 만나면서, 일상의 얘기들과 같은 겉도는 이야기로만 가득 채웠다면, 우리의 만남은 지속되지 않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대화 안에는 충만함 보다 공허함이 더 컸기 때문일 겁니다.

 

두 번째로, 바울일행은, 장터로 나갔습니다. 철학자들과 쟁론했고, 그리고 그들의 토론을 들은 사람들 몇몇의 요청으로, 아레오바고 바위 위에 올라가 예수와 부활에 대해 복음을 전합니다. 하지만, 본문의 바울의 설교를 들어보면, 바울이 얼마나 아테네사람들과 철학에 대한 이해가 깊은지 금새 알 수 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종교심이 많구나”, “알지못하는 신까지 섬기는 구나”, “하나님도 그런 분들 중의 하나라고 열어놓았구나.” “온 인류의 생명과 호흡을 주장하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의 소생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

바울이 쟁론했던 에피쿠로스학파는 고통없는 삶, 행복을 추구하는 현실의 삶에 집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여기에 내세는 없었습니다. 반면에, 스토아 학파는 미덕과 양심을 강조했습니다. 신이 존재하고, 그 신의 성품을 따라, 범신론적으로 세상 모든 만물의 이치를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행복을 추구하거나, 만물의 목적대로 살아야 한다는 양쪽 학파의 주장에~ 기독교의 교리와 맞닿아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분명히, 바울은, 에피쿠로스학파에게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어떻게 유한한 인간이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을 것이고, 스토아 학파에게는, 양심적인 인간이 과연 가능할지, 인간의 힘으로 가능할지, 그리고 신은 정말 그런 것을 원하는지 인생의 목적에 대해 설명했을 겁니다. 그래서, 이 양쪽학파와의 대화를 들은 자들이, 바울에게 아레오바고 바위 위에서 기독교를 설명할 기회를 주었던 것이겠죠.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요? 

[대화주제]입니다.

저는 기독교에 대한 두가지 숙제를 풀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교회 안에 만연한 세속대화입니다. 과연 이런 주제나, 이런 표현들이 신앙공동체 안에서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 드는 주제와 표현들인데요, 생각보다 저속하거나, 짧은 식견으로 말하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대화들입니다. 부족한 목회자의 탓이기도 하겠지만, 신앙인 스스로 자신의 말과 행동을 점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두 번째는, 원론적인 성경언어 구사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교인들은, 교회다니라는 말 밖에 안한다는 겁니다. “예수믿으라, 교회다니라.”

아는 지인 중에, 누님한테 전화가 오면, 교회다니냐는 점검부터 시작한답니다. 술은 얼마나 마시는지, 지난주 교회는 갔는지, 앞으로 술끊고, 꼭 교회가라... 이 얘기를 항상 레퍼토리처럼 반복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불편함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저들은 전도만 하려고 해~”

왜 이런 불편한 마음이 비신자들에게 심겨진 것일까요?

복음의 언어라는 책에서 밴더스텔트는 복음의 언어는 시대마다, 상황마다, 심지어는 개인에게 맞춰서 변형시켜야 한다는 말인데요. 예를들어, 맛있는 마카롱을 선물로 주면서, 예쁜 박스에 넣을 것인지, 검은비닐봉지에 대충 담아서 줄 것인지, 고민하지 않는 것이 이시대의 교회라는 것이죠. 제대로, 선물이 선물로 작동할 수 있도록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 아이러니 합니다. 밖에서는 교회를 말이 안통하는, 원론적인 성경언어만 구사하는 사람이라고 오해하는 한편, 교회 안에서는 복음이 사라진 세속적인 언어가 만연하다는 것이 말이죠.

신자된 우리는 어떤 언어를 구사해야 할까요? 어떤 말을 해야 하고,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생각을 그리스도께, 언어도 그리스도께 집중시키는 신실한 신자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https://youtu.be/TTfbWnjs2kY

 

 

#사도행전

#10분묵상

#QT

#매일성경

#경건생활

홈 | 꿈터교회 (modoo.at)

꿈터교회.동탄 - YouTube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