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10분 묵상

자각 / 신명기 29:1-13

스윙핸즈 2024. 4. 17.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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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각

2024.04.17.

신명기 29:1-13 // 4.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오늘 함께 묵상할 주제는 자각입니다.

신명기 29장까지 오셨다는 건, 이제 신명기 마지막이 보인다는 소린데요, 여기서 잠깐 전체적인 구조를 한번 더 살펴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매일성경 개요에도 나오지만, 신명기가 모세의 글, 마지막 고별설교라고 보시면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광야생활의 마무리를 앞두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이제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당부와 원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명기는 이런 당부의 말이 뒤섞인 설교를 모아놓은 것이고, 오늘 신명기 29장이 모세의 세 번째 설교가 시작되는 부분입니다.

 

세 번째 설교가 시작되는 부분에서 모세는 다시, 이스라엘의 현 위치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너희는 애굽에서 나온 하나님의 백성이다....

2,3절입니다. “2.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의 목전에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 3.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너희가 행하신 모든 일을 보았고, 큰 기적과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다. 너희는 분명히 보았다라는 팩트를 말합니다. 하지만, 약간 애매한 말을 하는데요,

4절입니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보았는데~ 이건 부인할 수 없는 팩트인데~ 깨닫는 마음, 보는 눈, 듣는 귀는 주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약간 이런 의미입니다. “왜 깨닫지 못하는가?” 보이지 않는 것,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듯 합니다.

왜 보고, 듣고, 경험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는 왜 그리 더딘가?

사실, 이들은 실제적으로, 보고 듣고, 경험했습니다.

5. 40년동안 광야에서 주께서 너희를 인도하셨다. 옷이 낡지 않았고, 신발이 해어지지 않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실제적인 기적을 큰 사건으로도 경험했을 뿐 아니라, 낡지 않는 옷, 닳지않는 신발과 같은 일상에서도 기적을 경험했던 것이죠.

 

그러면, 오늘 우리는 본문을 묵상하며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요? 

[자각]입니다.

여호와께서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시지 않으셨다."라는 문구는 마치, 하나님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닫지 못하도록 막으신 것 같은 뉘앙스를 줍니다. 그러면, 깨닫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막으셨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못이 없다는 말일까요? 모든 문제가 하나님이라고 보아야 하는 걸까요?

신명기와 출애굽기를 모세가 썼다고 본다면, 그러면 비슷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들을 보내기를 즐겨 아니하고...“ (출애굽기 10:27)

바로의 강퍅함도 하나님의 문제였을까요?

 

,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강퍅하게 하셨기 때문에, 바로는 죄가 없었고, 역할을 악역으로 분배하신 하나님의 잘못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부분은 어떻게 된 것이냐면, 바로는 이미 하나님을 배격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착취했으며, 하나님께 순종치 않으려는 굳은 마음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마음을 굳이 돌이키려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깨닫는 마음을 안주셔서, 이스라엘이 강팍하게 행동했고,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스스로 강팍해졌고,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악을 행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해하는대로, 하나님이 안도와주셔서 이스라엘이 악을 행했다라고 본다면,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야 했을까요? 이스라엘을 강제적으로 깨닫게 하시고,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강제적으로 막으시고 했어야 하는 걸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선한 목자가 아닌, 강도요, 도적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문을 부수고, 벽을 허물고, 마구잡이로 들어와서 해하는 자를 강도라고 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요?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립니다. 강팍한 마음이 돌아서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이죠.

 

풍삶기에서, 구원에 대한 예화가 등장하는데요~ 강물에 빠진 사람에게, 정확하게 밧줄을 던져주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밧줄을 잡은 우리의 밧줄잡는 행동을 '믿음'이라고 묘사합니다. 아주 절묘한 예화입니다. 내가 밧줄을 잡은 것이 어떤 공로도 없다는 말인거죠. 이 예화로 지금의 상황을 빗대자면, 하나님께서 우리 손을 움직여서 밧줄까지도 잡게했어야 한다~라고 주장해야 할까요? 그러면 인간의 의지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인간은, 로보트가 되는 것이죠. 그리고, 만약 그렇게 했다면, 하나님은 선한 목자가 아닌, 강제적이고 억압적인 자가 되어버리시는 것이죠.

 

그러면 다시 돌아와서요. 하나님께서 깨닫는 마음을 주시지 않았다는 말과~ 바로가 강팍해졌다는 말은~ 이스라엘 자신들의 강팍함, 바로왕 본인의 강팍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했다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6절도 마찬가지입니다.

6. 떡을 금하고, 포도주와 독주를 금함은, 하나님을 깨닫게 함이라 하십니다.

하나님이 밥을 못먹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을 경험하게 하시면서 까지, 이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소망하셨던 것이죠.

떡과 포도주는 고대 근동의 기본적인 식료품이었는데요, 다른 민족은 먹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만 못먹게 했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이스라엘 스스로가 식량을 해결할 능력이 없는 열악한 자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찮은 자들의 상황을,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얼마간 지켜보고 계셨다는 말인데요~ 하나님께서 고의적으로 그들의 어려움 상태를 지켜보셨던 것은, 고난의 시기를 지나게 하셨던 것이지요.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 누구이신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얼마간 그들을 주림을 지켜보셨다는 말인데요, 하늘에서 만나, 메추라기라는 기적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하시려는 의도였던 것이지요.(16)

결국은, 하나님을 자각함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을 배우고 싶어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안 깨달아진다고, 하나님을 자각하지 못하겠다고~ 하나님을 핑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셔야 합니다. 내 말과 행동이 다르게 행동하고 있는지, 스스로 살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전에, 어떤 집사님이 물으셨습니다. 목사님, 저는 신앙이 좋아지고 싶어요. 집사님~ 그러면, 함께 창조타락구속을 읽을까요? 아니요, 저는 시간을 낼 수가 없어요..... 혹시, 아무것도 안했는데, 하나님이 믿음을 부어주실꺼라고 생각하시진 마시지요. 품을 들이셔야 합니다. 기도의 품도 들이셔야 하고, 성경읽는 품도 들여야 하고, 교회도 출석하는 품, 공동체 식구도 만나서 시간과 에너지를 품을 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품을 들여야, 전인적인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신학에서는 이를, 통전적 신앙이라고 부르는데요~ 전체를 아우르는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노력하고, 수고한다는 말입니다. 힘을 내시지요. 의도적인 수고, 주를 향한 애씀과 열심은,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더 튼튼히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치 않는, 신실한 꿈터성도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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