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10분 묵상

위선(표리부동) / 마가복음 12:35-44

스윙핸즈 2024. 3. 18. 00:01
반응형

 

위선(표리부동)

2024.03.18.

마가복음 12:35-44 // 38.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함께 생각할 주제는 “위선(표리부동)”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마가복음 12장 전체에서 계속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논쟁을 벌이셨던 예수님의 스텐스를 유지한 채, 종교지도자들에 대해, 특히 외식하는 서기관들에 대해 가감없이 말씀하십니다.

우선은, 예수께서 권위 있으셨음을 보여주는데요~ 서기관 중에, 예수님의 뛰어남을 보고 와서 ‘계명의 첫째가 무엇이냐’고 묻는 신실한 자도 있는 반면, 성경교사였던 서기관들이 자신의 가르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지적하십니다.

35절.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서기관들이 진지한 숙고 없이 가르치는, 다윗의 자손 메시야라는 문구에 대해, 예수님은, 진짜 다윗의 자손이 맞는가 하고 질문하셨고, 시편 110편을 인용하여, 그들의 지식이 겉도는 지식임을 드러냅니다.

그러면서, [외식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주의하시는데요.

38-39절입니다. “38.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 39.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외식하는 서기관들은,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문안 받으려 했습니다. 회당에서는 높은자리에 앉으려 하였고, 잔치에서도 상석에 앉으려 했습니다.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죠. 하지만, 그들의 실체는~ 이랬습니다.

40절. “40.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 애썼지만, 그들은 가난하고 연약한 취약계층인 과부의 재산을 속여빼앗았습니다. 인간적으로 참 나쁜 사람입니다. 반면, 하나님께 대하여서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보이려, 외식으로 길게 기도했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것과처럼, 사람이 많은 길 중앙에 서서 보란 듯이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초점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경건한 자라는 칭호는 가당치 않은 거죠.

이어지는 과부의 두렙돈 이야기는 그러면, 그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마가사도와 누가사도는, 이 본문들을 의도적으로 붙여서 배치하면서,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의 의도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타켓은, 외식하는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42-43절입니다. “42.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3.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두 렙돈을 넣은 과부를 보며, 예수님은 칭찬하셨습니다. 아마도, 추측하기에 과부는 가난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두렙돈은, 가장 작은 통화화폐로 한 데나리온의 64분의 1이었다고 하는데요. 이 돈은, 성전 당국이 하루치 떡을 사먹도록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차원에서 주는 돈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과부가 이 동전을 하나님께 바쳤다면, 정말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고, 하나님께 바친 것이 맞습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의지한 신실한 믿음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배치는요~ 서기관들, 외식하는, 표리부동한 종교지도자들을 더욱 부각시키는 과부의 모습이 되는 것이죠. 40절에서, 이 종교지도자들은 과부의 재산을 가로챘는데, 과부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너무 비교가 되는거죠.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요?

네, 위선, 표리부동입니다.

말과 행동의 일치, 신앙과 삶의 일치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한다는 말은, 그냥 어떤 미지의 존재가 있다고 믿는 수준이 아닙니다. 외계인이 있다거나, 태양너머에 신비한 우주가 있다거나, 그런 신념이 아닙니다. 차라리, 독립운동가 같은, 조국을 위한 신념과, 그런 일생을 살았던 사람들의 신념이, 오늘 우리가 예수제자라는 신앙과 더 맞닿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삶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안중근의사가 나오는 ‘영웅’이라는 뮤지컬 영화를 보았는데요, 영화 후반부에 안중근이 옥에 갇히자, 안중군의 어머니가 편지를 보냅니다. 뭐라고 써서 보냈냐면,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려 하지 말고, 자랑스럽게 죽으라~”고 편지합니다. 편지를 쓰는 어머니도 울고, 편지를 받아들고 감옥에서 읽는 안중근도 울고~ 저도 울컥하며, 감명깊은 장면이었습니다. 왜 이들은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을까요? 네, 신념입니다.

신념대로 살아가는 것, 신념대로 살아내는 것.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신념을 위해 포기하는 것이 언행일치의 삶인 것이죠.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 제자로 산다는 말은, 이와 결을 같이 합니다. 예수제자의 제자의 길을 걷는 다는 것, 하나님백성으로서, 하나님나라 복음을 위해 산다는 말이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가 이땅에 실현되는 것을 위해, 십자가에서 기꺼이 희생하셨습니다. 예수제자인 우리는, 예수를 닮아 같은 신념,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인데요. 그렇다면, 우리 역시 예수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나라가 이땅에 이루어지는 것, 내 삶에, 우리의 가정에, 교회뿐 아니라, 회사, 지역공동체, 우리가 속한 그 어디라도, 주님나라가 실현되는 것을 위해, 일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살까요? 부탁드리기는, 표리부동한 종교지도자들처럼 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남들의 문안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뒤로는 약자를 착취하고, 괴롭히고, 이권을 챙기기에 급급한...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말씀에 우리의 실제 삶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지요.

사순절 마지막 주를 보내며, 예수십자가 앞에 좀더 많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날짜는 흘러가는데, 우리의 삶은 예수와 거리가 멀다면.... 그건, 내가 제자의 길을 걷고 있는가 다시 점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번주부터 시작하는 10일간의 공동체성경읽기를 통해, 고린도전서도 묵상하시고, 그 말씀 앞에 우리가 발견해야 할 소중한 신앙의 진리를 발견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혼탁한 세상 속에서, 세속에 물들지 않으며, 신자로 믿음의 방향을 잘 세워, 예수처럼 이 땅을 살아가는 신실한 꿈터성도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