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10분 묵상

딱딱한 막대기(바른교리) / 욥기 36:1-33

스윙핸즈 2023. 12. 12.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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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 막대기(바른교리)

2023.12.13

욥기 36:1-33 // 24.그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고 높이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의 일을 찬송하였느니라 25.그의 일을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나니 먼 데서도 보느니라 26.하나님은 높으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의 햇수를 헤아릴 수 없느니라...

 

오늘 함께 묵상할 주제는 딱딱한 막대기(바른교리)”입니다.

본문 욥기 36장은 이어지는 엘리후의 발언입니다. 엘리후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사실, 손색이 없습니다.

5-7절입니다.“ 5.하나님은 능하시나 아무도 멸시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사 6.악인을 살려두지 아니하시며 고난 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며, 7.그의 눈을 의인에게서 떼지 아니하시며 그를 왕들과 함께 왕좌에 앉히사 영원토록 존귀하게 하시며..”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심, 우리를 사랑하시고, 존중하시고, 악을 미워하시고, 선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그의 논증은 네 맞습니다.

15,16. “15.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 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 16.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대를 환난에서 이끌어 내사 좁지 않고 넉넉한 곳으로 옮기려 하셨은즉 무릇 그대의 상에는 기름진 것이 놓이리라...”

곤고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학대와 같은 환난에 귀를 기울여 우리에게 초점을 향하시는 하나님~ 구원하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하기에, 우리는 항상 주님 앞에서 은총을 입습니다.

 

오늘 엘리후와 세 친구가 가진 이 원칙을 우리는, ‘교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about) 배워~ 그분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 은혜와 긍휼이 많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주장합니다.

여기서, 오늘 이 교리를 저는 딱딱한 막대기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 딱딱한 막대기는 장단점이 있습니다. / 딱딱한 막대기는 잘 부러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좀처럼 변형되지 않습니다. 막대기가 변형되지 않는다는 말은, 막대기를 기준삼아 거리를 재거나 크기를 잴 수도 있고, 옷을 걸어두거나 철봉으로 쓸수도 있을만큼 단단하다는 말입니다. 쓸모가 많습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이런 딱딱한 막대기의 필요성이 우리에게 대두된 것은, ‘이단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시작되면서 기독교의 아류들~ 하나님을 왜곡하고, 예수님에 대해 바르게 전달하지 않고, 신자된 성도들을 사심 가득하게 조작하게 된 양태에 대해, 명확한 원칙을 세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솔루션 중의 하나로, 가장 먼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던 거죠. 그래서, 교리공부는 그당시나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것이 되었습니다. 기준이 되니까요. 아마도, 우리성도 역시 교리공부를 다양한 곳에서 이미 경험하셨을텐데요. 하나님의 속성(전능하심, 무소부재, 전지하심, 사랑의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삼위일체하나님 등등)을 매우 많이 접하셨을 겁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하나님에 대해 about 알아, 기준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딱딱한 막대기에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단에게서 기독교를 수호하고, 바른 교리를 가르친다는 명목하에~ 부수적으로 자행되었던 많은 잘못들이 또 있습니다. 중세시대에 마녀재판을 한다든지, 거룩한 성경을 라틴어에서 영어나 독일어로 번역하면 죄라고 선언하고 사형을 한다든지, 고해성사를 안하면 교회에서 퇴출시킨다거나, 반복되는 교리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천국으로 승격되지 못한다고 한다거나... 헌금을 강요하거나, 교회건축에 노동을 동원하거나, 교황과 사제같은 목회자들의 권위를 강조하면서 절대순종을 요구했습니다. 좋은 교리 밑에~ 여러 가지 자의적인 법칙들이 생겨난 것이죠.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 사람입니다. 사람이 사라졌습니다.

중세시대를 암흑기라고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자랑스런 피조물인 인간을, 교회가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람을 지워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통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이 땅을 하나님나라로 만들어야 하는데~ 사람들을 지워버리고, 하나님만 남기니, 이 딱딱한 막대기는, 이단을 방어했을지는 몰라도, 남아있는 교회 내의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들을 짓밟는 도구가 되기도 했던 것이죠.

오늘 우리가 가진 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리는 가이드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about) 배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야 하고, 하나님을 배우는 것(with)이 되어져 합니다. 고로, 바른교리가 목표점이 아니라, 교리를 가이드 삼아, 중심인 예수님께 우리가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목표여야지, 철저한 교리를 잣대로 삼아서, 누군가를 정죄하고, 깨뜨리고, 그래서 사람을 지워버리는 일이 없어야 하는 것이죠.

 

오늘 엘리후는, 엄청난 바른 교리를 가진 사람이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빈약한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성경해석은 맞는데, 적용이 가난한 것이죠.

예전에 어떤 교회에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다보니 너무 기쁨이 커지셔서 양복 앞뒤에 예수천당 불신지옥 써붙이고, 버스나 지하철, 거리 횡단보도에서 열심히 전도하셨습니다. 근데, 문제는요~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이랑 큰 소리로 싸움을 하는 거였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생각해 볼 사안입니다. 복음전파라는 진리수호의 측면과 하나님의 형상을 사랑하는 일이 분리가 될 수 있는가라는 주제가 될 듯 합니다.

오늘, 하루도 만나는 사람, 나누는 대화, 생각하는 일들의 뒤에, 하나님이 계심을 기억하시면 어떨까요? 우리는 교리를 배우지만, 교리 안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성품이, 오늘 우리의 이웃에게 흘러가야 함을 기억하는 것이죠. 하나님 사랑하는 만큼, 사람을 사랑해내는 그런 넓은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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