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10분 묵상

옅어지다 끊어지는 줄 / 욥기 16:1-22

스윙핸즈 2023. 11. 21.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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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어지다 끊어지는 줄

2023.11.21

욥기 16:1-22 //17.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18.땅아 내 피를 가리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이 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라 19.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오늘 함께 묵상할 주제는 옅어지다 끊어지는 줄입니다.

욥기 16장은 과격해진 엘리바스의 발언에 대해, 욥이 대답하는 장면입니다. 이제 서로들의 대화는 불꽃이 튀고 있고, 거기서 진심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1,2절입니다. “1.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재난을 주는 위로자~ 사실, 너희의 위로가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3-5. “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자극을 받아 이같이 대답하는가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그럴 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자, 그래도 나는 너희처럼 말하진 않겠다. 사람이 인지상정이 있지~ 어떻게 그렇게 고통당하는 자에게 아픈 말만 콕콕 찔러하는가?라고 되묻습니다. 욥은, 세 친구들이 퍼부은 비난과 모욕을 견디기 어려웠던 듯 합니다. 그래서, 결국 화살이 다시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7-9절입니다. “7.주께서 나의 온 집안을 망하게 하셨습니다. 8.주께서 나를 상처투성이인 몸을 만드셨고, 나의 파리한 모습이 주께서 나를 공격하시는 증거라고 보여질 겁니다. 9.주님은 나를 찢으셨고, 나를 향해 원수처럼 대하셨습니다.”

욥의 친구들의 모욕과 공격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겨냥했다는 것, 혹시 아니라면, 하나님은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하시고 있는가? 설명이 안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욥의 고통의 상황은 욥을 무너뜨렸고, 스스로를 고립시켰고, 모든 희망이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소리칩니다.

11. 하나님이 나를 악인에게 넘기셨구나

12. 하나님이 나를 부숴뜨리고, 나를 과녁이 되게 하셨구나

13. 사방의 화살들이 나에게만 공격을 가하는구나.

그래서 나는 고통중이다....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께 다시 소망을 둡니다. 하나님이 공격한거 아니고, 하나님은 내 증인이 되실 것이라고 다시 고백합니다.

17-19.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땅아 내 피를 가리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이 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라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나의 슬픔을, 나의 부르짖음을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이고, 내가 의지할 중보자는 하늘에 주님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21.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

수년이 지나면 자신도 죽을 텐데, 죽어 없어진 후에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요?

오늘은, 관계입니다.

살다보면, 오랜시간 알고 지내 친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족과 같이 편하고 좋은 느낌이 있습니다. 혹은, 알게된 것은 얼마되지 않았는데, 급속도로 가까워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좋은 현상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어떤 사건 때문에 갑자기 돌아서 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는 관계의 끈이 옅어지다가 소리없이 사람이 멀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때는 어떻게 하시나요? 보통 이런 상황에 우리는 당황합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내가 더 잘해야 했다고 본인을 자책하는 사람도 있고, 또는 환경을 탓하거나, 멀어진 상대방을 미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이 떠나가는 것이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거죠. 여튼, 관계는 끈끈해야 좋은거고, 멀어지면 안되는 거고, 굴곡이 있으면 안되고, 항상 좋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런 개인적, 문화적인 생각들을 내려두고,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어떨까요?

저는 이런 관계에 대해서, 보통은 시간을 많이 들일수록, 그러니까 나의 소중한 시간을 누군가에게 자꾸 사용하면, 그들과 친밀해진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100%는 아니겠지요. , 반대로 노력해도 안되는 관계들이 있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건이 없어도, 서서히 멀어지고, 흐려지는, 차근히 정리가 되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관계가 소원해진다고 하죠~ 하지만, 많은 사람과 교제하고 있다면, 모두 챙기기에는 사실 한계가 있습니다.

오늘 욥과 세친구를 보아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들이 계속 친구가 될 수 있을까?” 40장쯤에서 욥은 모든 상황을 회복하는데요~ 이들이 다시 관계가 회복 될 수 있겠는가? 심히 염려되지만, 별로 친구가 아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만 그런가요?

 

자 그러면, 신자는 이 어려운 인간관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한발자국만 더입니다. 성향에 따라 다를 수 있는데,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은 친구를 보살피고, 혼자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관계하지 않는다면, 그 삶을 누구는 좋고, 누구는 별로인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예수십자가의 사랑은 말도 안되는 일,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지만, 그게 우리의 방향성이지만,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보다더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눈 앞에 보이는 교우들 뿐 아니라, 아파트주민, 마트아줌마, 택배 아저씨, 고깃집사장님 등 실제 눈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긍정과 인애의 마음으로 존재하자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할 것인가? to do?가 아니라,

어떤 존재로 살아가는가? to be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

는 말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못챙겨서, 누군가 나의 사랑을 못받아서~to do(무엇을 하거나 못해서)가 아니라, 나는 이런 존재야~ to be (내 존재가 스스로)친절하고, 상냥하고,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 사람을 끌어당기는 사람, 세상말로 호감이 있는 사람이 되자는 말입니다.

오늘 욥과 세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친구니까 싸우면 안돼, 우리는 서로 긍정만 해야 돼~ 싸워도 싸우지 않은 척하자... to do.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to be 내가 어떤 사람인가의 문제여야 합니다. 욥은 현재 세친구와의 변론 중에도, to be로 존재했고, 그 이후에도 여전히 to be로 존재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모든걸 자연스럽게 하셔도 됩니다. 자연스럽게가 무례하게, 마구대하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 닮은 제자가 되려고, 나를 열심히 수련하고, 훈련하면서, 인성이 발전하고, 예수닮은 마음이 흘러가도록 말이죠.

 

 

저 역시 지난주에도 약간 관계가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이 있어서 매우 서운했습니다. 이렇게 관계가 옅어지다가 사라지는게 아닌가 하는 염려가 되지만, ~ 그건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더군요.

기도하고, 축복하고, 언제든 또 연결되기를 기다리기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곳에서 역시 주님께서 함께하실 것이니까요~ 다시 그 소중한 인연들이 끈끈해지기를 기도하면서, 또 눈 앞에 보이는 신실한 형제 자매들의 친구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오늘도 한주를 살아갑니다. 오늘도 모두들 파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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