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10분 묵상

희망고문 / 욥기 24:1-25

스윙핸즈 2023. 11. 29.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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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고문

2023.11.30.

욥기 24:1-25 // 1.어찌하여 전능자는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

 

 

오늘 함께 묵상할 주제는 희망고문입니다.

본문 욥기 24장은 이어지는 욥의 발언인데요, 역시나 욥의 발언들은 하나님을 향한 한탄과 탄원이 주를 이룹니다.

우선은 현재 상황입니다. 본인의 상황 뿐 아니라,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우리 주변의 사안들에 대해, 과연 하나님께서 살아계신가 의문을 품습니다.

2절과 9절에서 어떤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악인입니다.

2-5절입니다. “어떤 사람은 땅의 경계표를 옮기며 양 떼를 빼앗아 기르며

고아의 나귀를 몰아 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으며

가난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나니 세상에서 학대 받는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

그들은 거친 광야의 들나귀 같아서 나가서 일하며 먹을 것을 부지런히 구하니 빈 들이 그들의 자식을 위하여 그에게 음식을 내는구나

이 악인은 남의 땅을 빼앗으려고 경계표를 옮깁니다. 가난한 고아와 과부의 가축들을 빼앗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내몰아 못살게 굽니다. 9절에서는 어머니의 품에 있는 아이를 빼앗고, 가난한 자의 옷을 뺏습니다. 나열할 수 없는 수많은 악행들을 서슴치 않습니다.

반면에서, ‘그들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5, 10, 12절에 등장하는데요~ 이들은 압제당하고 착취당하는 약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악한 어떤 자들은, 가난하고 약한 그들에 대해 악행을 멈추지 않는다고 합니다.

반면, 그들의 실상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음식을 구합니다.(5) 결국, 굶주린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옷을 빼앗기도 남을 위해 일하면서 자신을 돌보지 못합니다.

10,11(현대인의 성경) “10.그래서 그들은 입을 것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곡식단을 나르면서도 굶주리고 11.기름을 짜면서도 맛보지 못하며 포도주틀을 밟으면서도 갈증을 느낀다.”

약자들은 악인들의 노예가 되었고, 착취당했고, 학대를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알고도 외면하시는 듯 합니다.

12절입니다. “성 중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들의 참상을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이런 현실에 대해, 욥은 하나님 앞에서 의문을 갖고 시작합니다.

왜 하나님은 [회복의 날]을 정해주시지 않았는가?

1절입니다. (현대인의 성경) “1.어째서 하나님이 심판의 시기를 정하지 않으시는가? 어째서 그를 아는 자들이 그 날을 헛되게 기다리는가?”

하나님은 심판과 구원의 때, 그날이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언제라고 못박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다렸습니다. 그날이 올꺼라고, 그 날이 되면, 모든 악한 것과 어그러진 것이 바로잡히고, 애통과 슬픔이, 기쁨과 위로로 바뀔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날이 오질 않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날이 오지 않습니다.

, [희망고문]과 양상이 같습니다.

희망고문은, 거짓된 희망으로 오히려 괴로움을 주는 행위인데요~ 힘들어 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거죠~ “이제 곧 해결될테니 조금만 참아~” 지금 해결해 주면 되는데, 지금 하지 않고, 자꾸만, 자꾸만 그 날을 미룹니다. 을인 약자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해주는, 자신에게 공감해주는 사람의 말을 철썩 같이 믿고, 기다립니다. 고통과 눈물, 한숨을~ 조금만 견디면, 곧 해결될꺼라고 기대하면서, 희망을 가지면서 참습니다. 하지만, 그 날이 오지 않습니다.

이런 희망고문을 통과한 사람들은 이렇게 되묻습니다. “도대체 그날이 언젠데요?”

오늘 욥의 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도대체 그 날이 언젠데요?” “왜 날짜를 말씀하시지 않는건데요?” “우리가 기다린 시간들이 헛되게 만드시는겁니까?” 당연한 질문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날, 주의 날이라는 용어를 많이 쓰는데요~ 그날이 오면은, 우리는 슬픔 없을 것이고, 그날이 오면, 우리는 고통에서 해방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날을 잘 기다립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기다리지 못하고, 불만과 한숨을 토로합니다. 왜 그럴까요? 

, 현실의 문제가 녹록치 않기 때문입니다. 을인 약자의 입장에서, 고통과 슬픔이, 지금이 한계 상황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런 절박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기다리라는 말도 아니고, ‘왜 좀더 못참느냐?’고 다그칠 일도 아닌거죠.

몇 년전에, 삶에 소망을 잃은 어떤 청년과 대화를 할 일이 있었는데요, 그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은 저를 좋아하지 않으시나봐요~” 왜요? “제가 하는 일마다 다 잘 안돼요~” 제가 보기에 참 재능이 많은 친구였습니다. 하지만, 본인의 전공도, 또 직장도, 가정도, 남들만큼?이라고 해야 하나요? 평범하지가 않았던 것이죠. 그런 고통 중에 있는 지체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없었습니다.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한다는 자체가 희망고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마디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자주 만나요~”

위로가 필요했고, 격려가 필요했고, 그에게는 다시 일어날 힘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그 위로와 격려는, 예수님의 손과 발인 신자된 우리자신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거죠, 슬픔을 공감하는 거죠, 그의 일상을 공유하는 거죠, 그의 희망을 격려하는 거죠.

우리는 누군가를 격려할 때,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어느 특정부분에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연결됨은 필요합니다. 길을 스스로 찾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인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를 가르치시고, 지도하시고, 인도하실 것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곁에서, 뻔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또는 용기를 냈을 때, 충분한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근거리에 있는 것이 필요한 것이죠.

오늘 욥과 세친구들을 생각하면서, ~ 가까이에 잘 갔는데, 마무리를 잘 못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세친구를 타산지석 삼아, 오늘 우리도 뻔한 말로 희망 고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으로 마무리까지 잘하는 예수제자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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